13, 임실의 오봉산에 갔던 날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07. 5. 20. 16:06


시야를 답답하게 하는 연무와 푸석거리는 먼지는
비가 내린 다음날 하루쯤은 씻은 듯 사라지곤 해서
답답할 때나 기분이 가라앉은 날이면
하루쯤 시원스레 비라도 내리길 바랄 때가 있다.

어제는 그런 비가 내렸고

맑게 갠 새날의 아침을 맞았는데도
밑바닥까지 가라앉아 있는 남편을 그냥 두기가 안타까워서였는지
아침식사와 설겆이를 바삐 끝낸 아내가

목적지를 정해 놓지도 않고서

무조건 밖에 나갈 준비를 하라고 치근댄다.

오늘같은 날엔 "어디로 가자"며 앞장 서주면 좋으련만
혼자선 태두리 밖으로 벗어나 보지 못한 채 살아 온 아내에게
그런 기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고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하루쯤 느긋하게 돌아보고 싶어했던
옥정호가 있는 임실의 오봉산.....

그곳엔 지난 겨울 서울로 가는 날 새벽과
그 다음날 서울에서 내려오던 길에 전망대와 국사봉에 올라
안개가 자욱히 내려앉은 호수주변의 풍경을 직접 본적은 있으나,
전망대가 아닌 오봉산에서의 풍경은 사진으로만 봤을 뿐이라서
산행도 할 겸 그곳 촬영지점을 답사해 보고 싶었다.



( 국사봉 정상에서 바라본옥정호가 있는 오봉산 )

오봉산은 해발 513m로써 내가 발이 닳도록 다니는 무등산의 허리쯤 밖에 차지않고
더구나 고산지대의 산 허리를 자르고 깎아서 낸 길에서 시작하는 산행이라
걸어서 오르는 높이만 따지면 300여m도 채 되지않을 것 같아
산길에 익숙치 못한 아내나 오늘같은 날 내게 있어선 딱 알맞은 산행일 것 같았다.

고속도로에서 승용차가 가르는 바람소리가 긴장감을 더해 주고
비가 갠 5월의 아침 햇살과 푸르름을 더해가는 신록이 아름다워
정체되어 있던 무거운 것 쯤은 순간에 털어내 버릴 수 있을 것 같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순창읍을 가로질러 산중 꼬부랑길을 오르내리는 동안에
아름다운 산골풍경을 놓치지 않으려고 흘낏흘낏 훔쳐보며 달리다 보니
왕복차선 두개가 다 내 차지였지만
이럴 때 어김없이 타박을 해댈 아내는
차가 중앙선을 넘나들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잠에 떨어진 지 오래다.

일제때 노령산맥 줄기 사이를 흘러가는 섬진강 상류인 임실군 옥정리에서
댐(섬진댐)을 막아 생겼다는 옥정호는
사진에 관심이 있는 이들로 부터 사시사철 동경의 대상이 되어 온 곳이다.

집을 나선지 약 1시간쯤 걸려서 도착한 호수 순환도로의 중간쯤
ㅇㅇㅇ家 가문의 비석이 서 있는 곳에 차를 세우고 주변을 살펴보니
50여m쯤 떨어진 길 건너쪽에 "등산로"라는 작은 표지판이 보인다.

초입에서부터 희미하게 나 있는오솔길을 따라
30분이면 오를 수 있다는 오봉산엘 1시간이나 걸려 오르고 보니
집을 나설 때만해도 쾌청했던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하고
희뿌연 연무로 덮힌 옥정호가 한눈에 들어온다.



(오봉산 정상에서 바라 본 옥정호 전경 )

좋은 사진을 기대하고 온 것은 아니라지만
일말의 아쉬움조차 없는 건 아니다.
사진이란 기본적으로 빛이 받춰주지 않을 땐
아무리 숙련된 기술을 갖춘 사람들도 촬영을 포기하고 마는데
나와 같은 사람에게 있어선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오봉산에 다녀왔다는 표시라도 해놓고 싶어서
표지석에 앉아 증명사진을 한장 찍은 다음
오봉에서 내려와 쉬엄쉬엄 사봉으로 오르니
산중 갈림길에다 누가 적선을 해놓은 것일까?
일봉, 이봉, 삼봉과 국사봉의 갈림길이라며
막대기에 못을 박아 방향표시를 해 놓은 이정표가 그리 반갑고 고마울 수가 없다.

능선을 타고 오르내리며 한시간 남짓 걸려 국사봉에 오르니
우리가 걸어왔던 오봉산의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비록 그리 크지않은 산이지만
능선을 타고 걷는 아기자기한 맛과
아름다운 옥정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해서 좋다.

국사봉에서 조금 비켜내려와
바람이 닿지않은 따뜻한 곳에서 점심을 먹고
옥정호 전망대 쪽으로 내려와 신작로에 이르니
주차공간 한켠에 임실군의 관광안내도가세워져 있다.

집에 돌아가기엔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가볼만한 곳이 가까이에 없을까 하고 살펴보니
지난 설에 인사를 하기 위해서 소고기를 사러 갔던 곳
정읍 산외면이 임실군 경계에 있다.

그땐 명절이라서 그랬겠지만
고기를 사기 위해서 번호표까지 받고 차례를 기다려야만 했던 곳,
이름난 관광지도 아닌, 지극히 평범한 시골마을에
전국의 번호판을 단 자동차가 빽빽히 늘어서 있는 광경을 보고
적잖게 놀랬던 기억이 새롭다.

한우는 새끼를 두 번 낳은 3년생 암소의 육질을 최상품으로 치며
다음은 송아지 때 거세한 수소로써 거의 암소만큼 좋은 육질을 갖는다고 한다.
비거세 수소는 비록 암소나 거세 수소보다 육질이 떨어지지만
거세 소보다 5~6개월 정도 빨리 자라 24개월이면 다 자라게 된다는데
산외면의 고기값이 싼 이유가 바로 비거세 수소를 이용하기 때문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사실 난 입맛으로만 따지면 채소보다는 고기를 먹는 게 더 맛있고 좋지만
육식보다는 채식이 더 건강에 좋다는 일반적인 통념때문에
가능한 고기를 절재하고 있을 뿐이다.

직장에서 끼니때마다 올라오는 고기를 즐겨먹지 않은 이유는
씹을 때 푸석거림이 싫어서다.

내 아이들과 함께 고기를 먹을 때
상추에 고추와 마늘과 된장만 넣어서 먹는 이유 또한
고기가 적어 아이들에게 더 먹이기 위함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식탐을 절재한 것 뿐이다.

그러나 오늘은 갑자기 그렇게 하기가 싫었다.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튼튼한 이로 꼭꼭 씹어먹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수술을 해 버리면다시는 되찾을 수 없을 이.......

요즘 며칠동안 내가 가라앉은 직접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옥정호를 벗어나와 이정표를 보고 10여분 쯤 가니
산외면 한우마을은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다.

예전에도 그런 느낌을 받고 조금은 불쾌하게 생각했던 일이었지만
가계에 들어서는 순간 손님에게 "어서 오십시오"라는
상투적인 인사라도 한마디 던져줘도 좋으련만
사람이 오건말건 눈길조차 주지않는 건 시골의 예전 인심은 결코 아니다.
다른 집은 가 보질 않았으니 또 모를 일이지만.....

따지고 보면 고기를 사러 온 사람이

고기만 사가면 될 일이지 주인이 어서오라 가라 할 일은 아니다.

고기 몇 근을 사서 마을을 벗아나와
오던 길로 다시 되돌아 가고 싶은 생각에
그곳에서 가까운 호남고속도로가 아닌 정읍 칠보쪽으로 오니
산의 중턱쯤에서 시작된 길고 거대한 세줄기의 수로가 보인다.

옥정호에서 반대쪽인 서쪽 정읍시 칠보로 물을 넘겨
계화도와 호남평야를 적셔주는 한편
배수 하면서 그 낙차를 이용하여 발전하는 다목적댐이라고 한다.

호수 주변을 구비구비 돌아서 오는 길엔
전망좋은 곳 마다 잘 꾸며놓은 집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부럽기 그지없다.

아늑하고 아름다운 곳에 살아서가 아니라
외딴 곳 떨어져 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게 부럽다는 것이다.

남편의 심난한 심사를 헤아려줄 줄 아는 아내가 고마운나날들이지만
언젠간 아내 혼자 남겨지거나 아니면 나 혼자 남겨질 그날이 올터인데
홀로서 남겨진 채 살아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서이다.

나이가 드니

이(齒)만 약해진 게 아니라

마음까지도초라해진 모양이다.

2007,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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