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꽃셈추위라서
이른 아침 시간에 난실(蘭室) 문을 열어 놓으면 난(蘭)이 동해(凍害)를 입을 것 같고,
한 낮에 햇살이 내리쬐기라도 한다면 온도가 너무 많이 올라가 찜통이 될 일이라서
오늘은 쾌청한 날이 아닌 구름이 적당히 가려주는 날이길 바래며 집을 나왔다.
그러나 하필이면 이런 날
쏟아지는 햇살에 눈이 부시고 시리도록 파란하늘엔 구름 한 점 없다.
지금쯤 한증막이 되어있을 난실을 생각하면
끔찍하기만 하다.
10여 년 이상 줄곧 잘 키워오던 난을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를 오던 해에 관리 잘 못으로 반토막을 내고
이제 겨우 생기를 되찾아 가는 중에 또 다시 오늘같은 난감한 상황을 맞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난을 잘 키우시는 작은형님한테
줘버리지 못한 게 후회스럽기도 하다.
될대로 되겠지 하며 일에 집중하려는 그 시간에
"등기가 와서 오늘 배달할 예정"이라는 우체국에서 보내는 문자메시지다.
아파트 관리실로 전화를 해서 등기우편물 좀 받아놓으라 부탁 한 후
두어시간 쯤 뒤에 우편배달부한테서 전화가 왔다.
"일반 등기우편물은 관리실에 맏겨도 되지만 신용카드라서
사고가 나면 전달자가 책임을 다 져야하기 때문에
반드시 본인한테 직접 배달해야만 한다"며
어떻게 할거냐고 다그친다.
난감하다.
직장으로 가져오라 할 수도 없고
저녁에 다시 와 달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서
카드회사로 반송을 하라 해놓고 나니 슬슬 짜증이 난다.
쓰고 있는 카드가 없는 것도 아니면서
별로 쓰잘데기 없을 것 같은 카드는 또 뭐할려고 만들자고 해서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신청서같은 건 안 쓰는 건데 하며 후회해 봤자
버스는 벌써 떠나갔다.
집에 돌아오자 마자 베란다로 뛰어들어 갔다.
난실에서 한 낮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불보듯 뻔한 일이었지만
이미해질녘이라서 상황은 이미 끝난 셈이다.
통풍이 되지 않아 눅눅한 냄새가 가득한 난실의 창문을 열며 주절거린다.
"오늘 한 낮의 일로 얼마동안 후유증에 시달려야 하겠지만
그건 내 탓이 아니라 주인을 잘 못 만난 너희들의 운명이다"
텅 비어있었던 집안에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청소기를 돌릴까 하는 생각도 잠시일 뿐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소파에 가로 누우니
간섭없는 세상을다 차지한기분이다.
지금까지 집 안에서 만큼은 대장 자리를 단 한번도
빼앗겨 본 적이 없는데도 이게 왠 해방감인가?
지금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아이들과
재회의 기쁨을 누리고 있을 아내가 하나도 안 부럽다.
머리맡에 놓인 리모컨으로 TV를 켰다.
평소 즐겨 보던 다큐멘터리 프로를 보다가
스르륵 잠이 들어 반 시간 쯤 잤을까?
춥다는 느낌에 눈을 뜨니 창밖엔 어느새 어두움이 짙게 깔려있다.
하루에 세 끼니를 먹고 사는 버릇이 몸에 벤 사람이라서
때가 되면 끼니 어떻게 떼울까 궁리를 하지만
아내가 있을 때도
고구마로 저녁 한 끼니를 떼우는 일이 다반사인데
한 끼 안 먹으면 어떠랴 싶어 저녁은 그냥 건너 뛰기로 했다.
평소 같으면 거실과 안방에서 각각 TV를 차지한 채
한 쪽에선 질질 짜거나 발악을 해대는 드라마를,
또 한 쪽에선 뉴스나 오락프로를 보면서 시간을 보낼텐데
오늘은 혼자서 다 차지하니 내 세상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TV에선준 것 없이 미운 얼굴들만 보이고
채널마다 재미없는 프로만 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 간다.
이럴 땐 일찌감치 잠이나 자는 게 상책이다.
2층에 살 때 보다는 공기가 건조해 코가 잘 막히는 터라
가습기 하나 사 놓자고 잔소리처럼 해대도
가습기 관리를 잘 못하면 오히려 건강에 안 좋다며
아내는 물수건을 빨랫대에 걸어놓곤 했었다.
아내가 하던대로 수건에 물을 흥건히 적셔서 빨랫대에 걸어놓고
죽부인을 아내삼아 한쪽 팔과 다리로 휘감은 채 잠을 청하려니
시간이 갈 수록 정신이 또렸해는 건 또 무슨 일인가?
평소에도 잠에서 한 번 깨어나기라도 하면
좀처럼 잠을 못 이루고 밤새 뒤척여야 하는 못된 잠버릇이라서
이 기나긴 밤을 어떻게 지새야 하는지 생각하면 심난스럽기만 하다.
잠을 자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5분도 되지 않아 금새 잠에 취하곤 하는 아내는
지금 쯤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2009,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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