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이상할 일이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볼 때
몸살은 육체적으로 지쳐있을 때만 치루곤 했던 행사였으나
피곤할 일 하나없는 나날의 연속에서
갑자기 초저녁부터 한기가 느껴지기 시작하더니
밤이 깊어 갈 수록 손끝에서 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쑤시고 힘이 빠진다.
듣기론 몸에서 열이 나는 건 몸의 어디에선가 생긴 문제에
스스로 저항을 하는과정에서 생겨나는 현상이라고 들 하던데
그런 열이 아니라 과로를 하여 몸살이 났을 때의 증상이 틀림없다.
뚜렸한 이유나 예고도 없이 시작된 몸살이
병원엘 안 가고 며칠동안 몸으로 버텨낼 때처럼
단 몇 시간만에 나를 지치게 하고 만다.
남들은 감기나 몸살같은 건
몸으로 버티며 이겨낸다고 들 하지만
내 경우에 있어선 시작했다 하면 시늉만 하고 지나가는 법은 없었던 터라
느낌이 이상할 때면 일찌감치 병원을 찾는 게 상책이었다.
그러나 자장이 가까워 오는 시간에
동네 병원이나 약국이 문을 열어놓고 있을 리가 없다.
약상자를 뒤져
언제 사 놓은지도 모를 해열제 한 알을 먹었으나
방을 뜨겁게 달구고 이불을 둘러 써도
춥고 온 몸이 쑤시는 건 마찬가지다.
날이 샐 때까진 아직도 멀었고
병원에 문을 열기 까지는 세월이라서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밤새 끙끙 앓다가
새벽녘 쯤에 가까스로 잠이 들었나 보다.
오랜만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꿈을 꿨다.
두분 모습을 더 또렸하게 보고 싶어
꾸었던 꿈을 다시 더듬으려니
꿈속에서 봤던 그림들이 희미하게 흩어져 버린다.
아내가 머리맡에 앉아서
간밤에 이마에 얹었던 물수건으로 땀을 닦아주며
병원엘 가야하지 않겠냐고 한다.
땀을 흘려버린 탓인지
아직 힘은 없으나 머리는 개운하다.
마음같아선 지금이라도 밖에 나가
시원한 바람이라도 쏘이고 나면 말끔히 나을 것만 같았다.
아침을 준비하려는 아내에게
"이유없이 하룻밤 몸살을 앓고 해열제 한 알로 나아보긴 또 처음"이라며
도데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하자
"어제 오후에 있었던 일로 너무 신경을 써서 그런 건 아니냐"며 묻는다.
아내가 어제의 일을 지금까지 담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제는 갑자기 중요한 약속이 생겨
퇴근을 하자마자 그곳으로 출발할 수 있도록
아내에게 승용차를 가지고 회사 앞으로 와 달라고 했었다.
그러나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잘 알면서도
아내는 오히려 10여 분이나 늦게 도착했다.
평소에도 자주 막히는 길에서 난 사고때문에
어쩔 수 없이 늦었다는 것이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늦게 와 준 아내에게 짜증이 났고
약속시간에 늦을까봐 몹시 긴장했던 것은 사실이나,
가까스로 약속시간에 맞춰 도착해 일을 마치고 난 뒤엔
어판장에 들러 싱싱한 횟감과 꼬막을 사가지고 집에 돌아 와
모초롬만에 포만감을 느낄만큼 맛있게 먹기도 했었다.
아내의 걱정처럼 어제의 그런 일로 몸살을 앓는다면
날마다 싸메고 누어 지내도 부족할 일이다.
나는 누구보다 내 자신을 더 잘 안다.
그러나 마음이 아프면 심난스럽거나 침울해 지는 걸로만 알고 있었지
몸살을 앓을 수 있다는 건 솔직히 몰랐다.
그걸 미리 알고 있었다면
처음부터 "참 이상할 일이다"라고 시작할 게 아니라
"우울증이 올 줄 알았는데 하룻밤 몸살을 앓았다"라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난 밤에 앓았던 몸살은
"내가 만들어 씌웠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몸부림을 쳐댈 때 생겨난 진통이었노라"고 했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 우울증인지 몸살인지가 중요한 건 아니다.
며칠동안 양심이라는 저울에 올려져 있느 무거운 짐을
이젠 내려놓아도 초연해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는 게
더 중요하다.
냉장고를 열어
대접에 냉수를 가득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탄산음료가 아닌 맹물을 마셨는데도
꺼억하고 트림은 왜 나오는지 모르겠다.
2009, 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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