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6월 13일)
( 제석봉의 고사목 )
초봄부터 기온이 30도 가까이 오르락거리긴 했어도
일상에서 으레 6, 7, 8월 석달을 여름이라 해 왔으니
달력에서 여름이 시작된지도 10일이 더 지났다.
지리산으로 떠나기로 약속이 되어있던 날,
행여 제 시간에 일어나지 못할까 걱정이 되어서
자명종 시계를 네시 반에 맞춰놓긴 했으나
늘 그랬던 것처럼 시계가 깨우기 30분 전에 눈을 뜨고
버릇처럼 베란다 유리창문을 열어서 하늘을 바라본다.
도시불빛과 대기오염으로 별을 보기가 쉽지않다고는 하지만
새벽의 상큼한 공기로 심호흡을 하면서
맑은하늘에 초롱초롱한 별들을 볼 수 있어서 좋다.
간밤에 미리 챙겨놓은 베낭을 메고 서둘러 집을 나와
새벽공기를 가르며 달리던 88고속도로에서
산 능선위로 붉게 타오르는 태양을 보는 순간
한 낮의 무더위를 견뎌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함께 간 일행들의 얼굴엔 긴장의 빛이 역력하다.
( 망바위 근처라 생각되는데.....)
어쩌면 매표원이 아직 잠에서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을 백무동 매표소앞을
살금살금 숨을 죽이고 통과하려는 찰라
쪽문을 드르륵 열며 매표원이 우리 일행들을 맞는다.
우리들이 서로 마주보며 웃는 이유를 매표원이 알 리가 없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그 역시 돈을 주고 산에 들어가고
절이 어디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사찰관람료를 내야한다면
내 쓰린 속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 장터목에서 천왕봉을 오르는 중간쯤인 것 같다.)
신발 끈을 질끈 동여매고 이마와 목에 밴드와 땀수건을 두르고.....
산행을 시작한지 반시간도 채 되지않아 숨이 목까지 차오르며 헐떡거린다.
우리가 택한 백무동에서 장터목 산장의 코스는 거리가 짧은 반면에 경사도가 높아
나와같이 폐활량이 적은 사람들이 서둘러서 오르기엔쉽지가 않은코스다.
더구나 욕심스레 1.8리터짜리 맥주 두병과 식수와 갖가지 먹거리를 베낭에 넣었으니
내 스스로 사서 고생을 하는 셈이라 누구에게 하소연도 못할 일이다.
또한 일행들의 몸 무게도 규격돈(規格豚)인 나에 비해서 15~20kg 정도 가벼운 탓에
오르막길에서 내가 뒤쳐지는 것은 어쩌면당연할 일이겠지만
내가 평소에 한 오기 하는 사람이라서
입에 거품을 물고서 비지땀을 줄줄흘리며 뒤따라 오른다.
( 제석봉을 지나 가파른 천왕봉으로 오르기 직전 )
산에서 20kg은 평지에서 100kg의 무게와 같다는데 그게 사실일까?
누군가가 써 놓은 산행기에
"100번을 왔다가도 모를 것이 지리산"이라 했던 말이 생각난다.
혹자는 "치악산에 갔다가 치를 떨고 가고
지리산에 갔다가 지긋지긋함을 느끼고 간다"라고 했다.
그 만큼 지리산은 큰 산인데 비해서 기후변화마저 극심하니
그런 말이 나올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장터목에서 세석쪽으로 하산길에 만나는연화봉 근처인 것 같다. )
그동안 지리산의 크고 작은 봉우리와 계곡을 수없이 들락거린 것을 빼고
두번의 종주산행을 포함해서 네번째로 천왕봉을 오르는 산행이지만
산행을 해 오면서 산에 대한 두려움과 겸손을 깨달은 때문인지
자신감 보다는 마음의 긴장감이 처음 지리산을 오를 때와 별로 다름이 없다.
섬진청류, 노고운해, 벽소명월, 반야낙조, 피아단풍, 서석철쭉, 칠선계곡.....,
작년 그 뜨겁던 여름날에 친구와 2박3일의 지리산 종주를 하면서
마침 산 능선 곳곳에 아름답게 피어있는 들꽃들의 무리를 보며
"천상의 화원이 이만하랴"며 지리10경에서 들꽃풍경이 제외된 것에 대해 아쉬워했었는데
지금은 때가 이른 것인지 노루오줌과 동의나물, 늦게 피어 지지못한 철쭉 말고는
아름다운 들꽃들을 볼 수 없어서 아쉬움이 적지가 않다.
(제석봉에서 바라본 천왕봉)
백무동에서 출발한 지 세시간 반만에 올라선 천왕봉엔
먼저 와 있던 사람들이 표지석을 두고서 기념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구름 한점 없는 햇살 눈부신 천왕봉이지만
가끔씩 스쳐지나는 바람결에서 오싹함마져 느껴진다.
맨 처음 천왕봉에 올랐을 땐
그날 비가 갠 날씨 탓에 멀리 남해바다를 아스라히 바라보는 행운도 있었는데
자욱하게 내려앉은 연무탓에 노고단과 반야봉만 겨우 가물거린다.
작년 종주산행때 노고단의 원추리꽃, 반야봉에 만발해 있던 비비추......
그 산행을 함께 했던 내 친구의 얼굴이 선하게 떠오른다.
( 천왕봉에서 함께 간 일행들과 )
세상을 살다가 보면
어려운 길을 함께 걸어줬던 사람들만큼 기억에 오래 남는 일은 또한 없다.
힘들어 지친 길에서 등에 진 짐하나 덜어주는 사람만큼 고마운 일 또한 없다.
갈증에 허덕이는 길에서 시원한 물 한모금 나눠주는 사람만큼 좋은사람 또한 없다.
내가 작년에 함께 걸었던 친구를 생각하듯
훗날엔 오늘 함께 걸었던 일행들을 생각하며 미소 지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쉽지않은 길을 함께 해 줘서 힘이 되었노라고, 고마웠노라고, 즐거웠노라고......
천왕봉에서 장터목대피소, 연하봉, 삼신봉, 촛대봉....,
갔던 길을 되돌아 오는 것보다는 가지않았던 길을 택해서 내려오다가 보니
오를 때 시간보다 두배나 더 걸리는 먼 길이었지만
여름날의 긴긴 해에 마음은 한결 느긋하기만 하다.
( 한신계곡으로 내려오는 길어디쯤 다리위에서 바라본 풍경 )
세석대피소에서 백무동을 향해 급경사길을 한시간쯤 내려오다가
한신계곡이 시작되는 가느다랗고 긴 폭포에서
후끈거리는 발을 얼음처럼 찬물에 담그니
문득, 그곳에 그대로 머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려면 절대로 못할 일임을 잘 안다.
90kg의 무거운 짐을 얹고서도 묵묵히 버텨줬던 내 발을 대견스러운 듯 내려다 보며
내 신체의 일부분만을 두고서 특별히 고마워해본 적은 또 처음이다.
주인의 이런 마음을 알아나 주려는지......^^*
( 장터목 대피소 앞에서....... )
크건 작건 간에 어떤 일을 하나 해냈다는 생각이 들때면
마음의 긴장이 풀리고 기분좋은 피곤이 엄습해 오곤 한다.
죽은 듯 잠에 들었다가 다시 깨어나는 이른 아침,
새벽하늘의 초롱한 별빛처럼 맑아진 내 가슴속에
상큼한 새벽공기를 터질 듯 삼켰다가 내 뱉는다.
충만된 의욕으로 하루의 삶을 시작하려는 의식이기도 하다.
2004년 6월 13.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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