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잿빛 2월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07. 2. 25. 04:15

작년 이맘때 쯤 녀석과녀석의 직장동료와그의 친구 넷이서 순천 조계산에 짧은 등산을 하고 난 다음 인근 음식점에 들러 고로쇠물에 술을 곁들여서 마시고 얼큰하게 취해서 밤늦게 돌아 온 적이 있었다.

네 사람은 작년 뿐만 아니라 몇 해 전부터 이른 봄이면 의례 고로쇠 물을 마시러 가거나 자주는 아니었지만 1년에 적어도 두세번 쯤은 서로에게 시간이 맞을 때마다 여수, 광양 망덕, 승주 상사댐, 율포 등지로 돌아다니며 하루를 보내고 저녁 늦게야 돌아오곤 했다.

일행 중 한 사람이순천이라 주로 그쪽 방향으로 가야 했으며 갈 땐 주로 내가 승용차 운전을 했지만 되돌아 올 땐 의례 술을 마시지 못하는 녀석이운전을 도맡아야만 했다.녀석은 일찌감치 술을 멀리했던탓에항상 미안하기는 했지만함께 있는 동안 지루해 하거나 재미없는 표정을 겉으로 드러내 보인 적이 한번도 없었다.

( 순천선암사 가는 길 )


몇년 전 가을이 한창 깊어 가던 어느 날,네 사람이등산을 마치고 하산하여인근 바닷가에 낙지잡이를 하시던 녀석의 사촌누님댁으로세발낙지를 먹으러 간 일이 있었다.

초가을 세발낙지가 한 입에 쏙 넣을 만큼 적당하다면 늦가을 무렵의 세발낙지는 입이 크지 않는 사람이 통째로 씹기엔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라서 뜨거운 물에 데쳐 먹거나 날것으로 먹는 경우엔 두 토막 쯤으로 잘라 먹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러나 먹는데 있어 남에게 뒤지면 억울해 할 만큼 소질이 있는 나를 비롯한 또 한 사람이 능숙한 솜씨로 낙지의 대가리를 나무젓가락에 꿰고 꿈틀거리는 발을 칭칭감아 참기름장을 듬뿍 찍어마파람에 게눈 감추듯먹기 시작하자 먹는데 소질없는 그들도 따라서 해 보지만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네 사람이 모일 때면 두 사람에게 있어선 그 날은 마치 생일잔치를 하듯 먹고 마시며 즐겼고 나머지 두 사람들 또한 같은 분위기 속에서 유쾌하게 보내며 서로 편안한 시간을 즐길 줄 아는 사이였다.

그날 집으로 돌아올 무렵누님께서 "네 사람이 먹은 낙지는 모두 일흔 세마리"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는 순간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세상에 누가 그렇게 많이 먹은 겨?"라며 배를 움켜쥐며 웃었다.

본인들이 먹은 걸 각자 어림짐작을 해 보니 잘 먹는 두 사람이 최소한 50여 마리 쯤 먹었던 것 같고 나머지 23마리는 둘이서 먹은 셈이었다.낙지 먹는 걸 지켜보고 계시던녀석의 누님께서한 친구에게 "혹시 입에서갯뻘(= 낙지가 바다 뻘 속에 살기 때문에)냄새가 안 나냐?"고 물을 정도였으니 그날 만약 신문사 기자들이 이 장면을 목격했더라면톱뉴스감이 분명했다.

(무안의 뻘낙지)

그러고 보면 녀석과 나는항상 지근 거리에 살았던 것 같다.

녀석은 군대생활을 마친 직후 지금의 내가 다니는 직장에 취직을 해서 몇 년 동안 다닌 적이 있었는데 내가 입사하기 직전에 녀석은지금의 직장으로 옮겨갔다. 새로 옮겨간 곳에서성실하고열심히 일해그곳의 장이 된건녀석에겐 정말 잘 된 일이었다.

서로의 가정을 꾸리기 시작한 신혼 무렵엔 먹거리를 같은 가계에서 사서 나눠먹을 만큼 한 골목에 전샛방을 얻어 살기도 했었고녀석의 큰 애가 서너살 쯤 되었을 때 우리집에 와서놀다가 현관문 유리창에 눈과 눈 사이 콧등을 다치는 아찔한 사고도 있었고, 가끔은 녀석의 가족들과 어울려 가까운 야외로 나가 두집 아이들이 잘 어울려 즐겁게 노는 모습을 바라보며 지루하지 않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다.

또한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할 무렵 서로에게 처음으로 내 집을 장만할 때에도 미리 그렇게 하자고 한 것도 아니었건만 지근거리에 있는 아파트를 사서 살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나와 녀석은 물론 아이들끼리와 안 사람들끼리는 누구보다 절친한 친구가 되어먹음직스럽게국이라도 끓이게되면식기 전에 한 그릇 퍼다 주며 하차잖은 것도 나눠먹을 생각을 하며 살았다.

세월이 흘러 아이들이 성장해 부모의 간섭에서 벗어날 무렵엔 두 내외가 해수욕장으로 피서를 다녀오거나 해마다 가을이면 최소한 서너번씩은 고향 바다로 운저리 낚시를 갔다가 하루를 함께 보내곤 했었다.

녀석과 나는 바다가 가까운외딴 시골의 이웃동네에서 태어나 십여리 머나먼 학교길을 걸어다니며 6년동안 한 교실에서 지냈지만녀석의 키가 나보다 훨씬 작았고 또 어느때 부턴가 남학생과 여학생이 서로 짝을 이뤄 앉아서 생활을 했기에6년동안 둘 사이에얽힌 기억할만한 일, 즉 같이 짝궁이 되어서 앉아봤거나, 장난을 치다가 싸움을 했거나, 말썽을 피워서 함께 벌을 섯거나 했던 일은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나와 녀석이 이런 인연들로 얽히기 훨씬 이전부터 녀석의 아버님과 내 아버님은 서로 동갑이셔서 마을의 동갑내기 친구분들과 갑계를 하시며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그러나 우리가 신혼일 무렵에 녀석의 아버님께서 병환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시게 되고 그 이후로 나의 아버님께선의식이 흐려지기 전까지 그의 가족들을 대할 때면 늘 각별하게 여기시곤 하셨다. 그러고 보면 녀석과 나는 대를 이은 인연, 다시 말해서 평범한 인연은 아닌 셈이다.

( 조계산 자락 어느 음식점 )

작년봄 조계산을 오를 때 녀석은 발등이 조금 붓고 아프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그때만 해도 발을 헛디뎌 관절에 무리가 가서 그러려니 하고 가볍게 생각을 했다.

녀석은 원래 술도 즐겨 마셨지만간이 좋지 않다는 검사결과를 통보받은 뒤론 일체 술도 끊고평소에도정기적으로 병원을 오가며 체크를 하고 쉬는 날이면 부인과 함께 적당히 산행도 하며 나름대로 건강을 관리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최근들어 날이 갈 수록 몸의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고 여름이 가까워 올 무렵엔 한번 가라앉은 목소리가 좀처럼 원상으로 회복되지 않았다.

당시에 큰 병원을 전전하며 식도와 기관지를 비롯하여 여러가지 검사를 받았으나특이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게 두어 달을 보내고 나서야 병원에서 폐암을 의심하게 되었고 그 이후 서울의 큰 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받은 결과 녀석의 폐암이척추까지 전이가 되어있어서 수술을 하기엔 이미 늦었다는 판정을 받았다.

사람들이 병들어 심약할 때 믿고 기댈만한곳이라곤 병원밖에 없다. 비록 지방 병원이지만이곳에선 시설, 규모, 의료수준 등에 있어 괜찮다는 병원에서그동안 숱하게 검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되었다는 사실이 원통하고 분할 노릇이었다.

녀석에게 나타났던 여러 증상들, 즉 식은 땀과 기침, 관절통증과 목소리의 변화 등이 폐암의 자각증상이라는 걸 뒤늦게야 알았지만이미늦어버린 상황이었다.녀석은 청천벽력과 같은 현실을인정하지 않은 채 "내가 왜?"라는 분노와 울분을 스스로에게 터뜨릴 뿐이었다.

무더운 한 여름 어느 날 나와 녀석의 부부 넷이서가라앉은 마음을 조금이나마 추스려 볼 심사로 가까운 곳에 있는 산림욕장으로가서 하루를 보낸 일이 있었다. 숲속엔 한 낮에도 산모기들이귀찮게 했지만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릴 무렵까지 숲속을 걸으며 두 사람의 마음 속 깊이에 있던 이야기를 모두 꺼내흉금없이 털어놓기도 하고앞으로의투병생활 등에 대해서 함께 고민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산길의 저편깊고 외딴숲속에 희미한 전등 불빛이 몇 개가 보였다. 그렇잖아도 휴양할만한 적당한 곳이 어딜까 고민하고 있던 터라 더듬거려서 그곳까지 가 보니아담한집들이 서너 가구가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있었다.

불이 켜져있는 한집에 들어가물으니바로 이웃의 빈집은"주인이 가끔씩 와서둘러보고만 가며 연락처를 알고 있으니 전화를 해 보겠노라" 했다. 다행히집 주인과 쉽게 연결이 되어 당장에 그 집을 전세로 쓰기로 하고며칠 후엔 그곳으로 거처를 옮겨투병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시간이 나는대로 그곳으로 가서 몇몇친구들 도움을 받아텃밭도 만들어 주고 내가 쉬는 날이면 녀석이 소화해 낼 만큼 적당한 운동과 등산도함께 해주곤 했다. 여름이 지나갈 무렵에야 녀석은 비로소 현실을 인정하게 되고 가을이 무르익을 무렵엔 새로운 의욕도 생겨나 건강회복을 위해서 열심히 운동을 하며몸에 좋다는 온갖 약초를 구해 달여먹으며지냈다.

겨울이 오기전에 녀석을 싣고 몇 차례 서울의 병원엘 다녀오는 과정에서 혈액검사 결과서를 받아 확인해 보니 정상치에서 크게 벗어났던 항목들이 정상치 쪽으로 점차 가까워지고 있어서 의사의 설명이 없더래도 좋은 방향으로 변화가 이뤄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의사는 "폐암은 더 이상 발전하지 않고 그대로 멈춰있다"라는 말을 했고 해가 바뀔 무렵엔 제법 건강도 회복이 되는 듯 싶었다. 녀석은 어느날 통화를 하면서 내게 이렇게 말을 했다. "1월 초부터 다시 직장에 출근할란다"고.....이 상태로라면 모든 것이 바램대로 이뤄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폭풍전야의 고요'일 줄은 정말 몰랐다.
"척추로 전이된 암덩어리가 신경을 자극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통증이 있을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들을 당시만 해도 허리의 통증은 시작되지 않았기에실감하지 못했다. 비켜가기만을 바랬던 통증이시작되어 날이 갈 수록강도가 세지자 부득히 병원으로 가서 방사선으로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통증이 사라지기는 커녕 치료부위가 함몰되어 척추의 균형이 흐트러지므로써 날마다 세차례씩 진통제로 그 통증을 견뎌내야 할 상황이 되었다.녀석은 내게 "지난 날들은 환자가 아니었던 것같다"라는 말로 고통스러움의 강도를 그렇게 표현하곤 했다.

며칠 전, 앞으로 일주일 후면 녀석과 서울의 병원에 가기로 약속이 되어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마음 한켠에 자꾸 걱정이 생겨나곤 해서 아내를 시켜 전화를 해 보라고 했다. 녀석의 부인과 통화를 하던 아내가 전화를 끊으며 "아무래도 ㅇㅇ아빠한테 무슨 일이 있는지 ㅇㅇ엄마가 울고있다"며 일러준다.

병수발에 지쳐있던 녀석의 부인이 내 아내의 전화를 받자마자 심난했던 마음을 눈물로 쏟아내는가 싶었다.제발 무슨 일이 벌어지지만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녀석네 집으로 급하게 차를 몰았다. 아파트 현관에 들어서니 녀석의 손위 처남내외와 사촌 누님께서 우리를 반겨 맞이하시지만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소파에 업드려 "어서 와라"며 우리를 반기지만 가프게 숨을 내쉬는 순간마다 일그러진 표정으로 고통스워하는 녀석의손을 만져 보니 얼음장처럼 차갑고 배는 평소보다 더 많이부풀러 있고발등은 많이 부어있다. 여태껏 기침만 계속되었는데 사흘 전부터는호흡곤란이 오고 눕게 되면 허리의 통증이 심해져 잠도 앉아서자야만 한다는녀석을 보니 코끝이 시큰해진다.

사람들은 잠을 자면서 쌓여있는 피로와 스트레스도 해소가 되고 육체에 생겨난 이상현상도 스스로 치유를 하며 원기를 회복한다고 한다. 지금으로 부터 5년 전 쯤, 녀석은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1달 남짓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그 무렵 어느 날 녀석의 병문안을 갔다가 위로를 할 심사로 "마음을 편하게 가져라"라고 단 한마디를 했더니만 극도로 신경이 예민해져 있던 녀석이 "너는 의사도 아닌 놈이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냐"고 쏘아붙이는 통에 내심 엄청나게당황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녀석이 고통스러워 하는 걸 보면서도일상적인 위로의 말 한마디를 건네는 일에도 극히 조심을 할 수밖에 없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만 볼 뿐이다.

그 다음날 새벽, 녀석을 서울 병원으로 데려가기 위해 승용차를 가지고 집으로 가니 병원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으면서도 어제보다 훨씬 심한 호흡곤란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날 새벽녘엔 구토까지 하고서 아침엔 밥을 먹지 못해 대신 생식을 먹었다고 하더니 갑자기 일어나 화장실쪽으로 가며 뱃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거실바닥에 토해내고 만다.

눈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이 절망적이었다. 친구의 초췌한 모습도 그랬고 오물을 닦아내는 친구의 부인도 지쳐있었다. 이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현실이암담하기만 했다.

출발예정을 한 시간이나 더 넘기고서 어렵사리 녀석을 승용차에 태웠다. 도저히 견디지 못할 만큼 고통이 있을 때 먹으라고 했다는 진통제는 마약의 일종인 듯 싶었지만 녀석은 차에 타기 전에 그걸 한알 입에 털어넣었다. 진통제의 효과인지는 모를 일이나 비상등을 켠 채로 고속도로를 질주하여 3시간 후 쯤 병원의 응급실에 도착할 때까지 녀석의 끙끙거리는 신음소리만 있었을 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온갖 환자들과 환자들의 보호자들로발디딜 틈도 없이 신음소리 가득한 응급실, 이럴 때병원에 아는 의사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요긴할 일이다. 녀석의 조카가 의사이고 그의 친구가 이 병원에 있어서 혈액검사, 심전도 검사, X선 촬영, CT촬영을 많이 기다리지 않고 마쳤다.

그리고 두어시간 뒤에 나온 검사결과는 폐와 가슴 사이에 물이 고여서 고인 물이 폐를 압박했기 때문에 호흡곤란을 유발했다는 설명이다. 그리고 의사가 녀석을 침상에 앉혀놓고 등허리 오른쪽 아래 부근에 주사기를 찔러 호스를 연결하니 새빨간 핏물이 쉽없이 쏱아져 나온다. 대략 1리터쯤 나왔을까? 녀석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고통이 사라진 표정이라서 나도 몰래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그러나 마음 한켠엔 "핏물이 고인 이유가 뭔지, 앞으로 이 현상이 재발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걱정으로 심난하기만 했다.

토하고 어지러웠기에 머리로 전이 가능성이 있는데 그 여부를 알려면 MRI를 찍어야 한단다. MRI를 정상적으로 찍을려면 11일이나기다려야 하고 응급실 환자는 밤 11시 부터 새벽 4시 사이에 찍는다니 늦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회사는 야근이라 많이 늦어지면 하루를 쉴 생각을 하고 올라왔으나 며칠 후에 다른 검사도 받아야 하고 마침 서울에 사는 녀석의 막내 여동생이 병원으로 왔기에 녀석을 동생에게 맏기고 혼자서 내려왔다.

자정이 가까워 오는 시간에 녀석한테서 전화가 와 "검사결과 머리엔 이상이 없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스러울 일이다. 잠시 후 녀석의 여동생과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오빠, 자꾸 절망만 보이는데 어떻해야 해요?"라며울먹인다.

투병생활을 시작할 무렵 녀석은 반드시 병을 이겨 낼 것이라는 나의 확신과 희망이알게 모르게 많이 옅어졌나 보다.병원으로 데려가는 날 고통을 참고 있던 녀석에게 그랬듯이 "모든 일엔 고비가 있게 마련이라 이 때만 잘 넘기면 된다"는 상투적인말을 동생에게도 다시 할 수밖에 없다.

한갖 하차잖은 물이나 나눠마시며 살아왔던내 마음도 이토록아픈데피를 나눈 형제의 마음은오죽하랴.


( 2006년 2월초, 무등산 )

설이 지나고 2월도 막바지에 이르렀는데

눈 다운 눈 한번내려주지도 않은 채,

코끝시린 바람 한번 불어주지도 않은 채

겨울은 그냥 이대로떠나려는가 보다.

녀석과 가끔 오르곤했던 무등산 양지녘엔

따뜻한 햇살에복수초도 노랗게 꽃을 피웠지만

녀석을 두고 온 내 마음은오늘도잿빛 하늘이다.

잿빛 2월이 가고 화사한 3월이 오면

지금까지 잘 어울려 살아왔던 것 처럼

앞으로도 오래도록알록달록한이야기를 함께새기며 살면........

..................참좋겠다.

2007년 2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