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雨中 한라산 산행기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06. 12. 21. 10:33

제주행 배가 출발하기 수분 공급 전 완도의 여객선 터미널 바로 옆에 있는 활어회 센터에 들러 일행 대여섯 명이 충분히 먹을 만큼 갑오징어, 해삼, 낙지, 전복 등을 사서 배에 올랐다.

11월 하순의 바닷바람이 차갑긴 해도 우리 일행들만 갑판 위에 모이도록 했던 것은 선실에 사람들이 많아 판을 벌리기엔 적당치 않은 탓도 있었지만, 기왕 배를 탔으니 바다를 여행하는 기분까지도 만끽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판을 벌여놓자마자 젓가락을 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벌떼처럼 몰려오고 그들이 지나간 자리는 마치 들녘에 메뚜기떼가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빈 안주 접시와 빈 술병만 나뒹구는 황량한 풍경이라서 실로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마침 갑판의 맞은편엔 우리보다 늦게 벌린 판이 있어 우리 일행들 또한 그곳으로 가 함께 섞이니 누가 주인이고 누가 객인지 따질 필요가 없었다.

90여 명의 직장동료가 함께 탄 제주행 배의 풍경은 그랬다.

얼큰해진 술기운으로 제주항에 도착하니 완도에서 출발한 지 3시간 반만이다.

숙소에 여장을 풀고 일행들과 가까운 해변으로 가 생맥주 몇 잔씩 마시는 거로 제주에 온 기념행사를 간단하게 치렀다.

 

자정이 넘은 시간. 피곤했던 탓에 잠에 곯아떨어졌다가 꿈결인 듯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심상찮아 깨어보니 새벽 4, 어둠이 내려앉은 창밖엔 장대 같은 폭우가 쏟아지고 있다.

실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침 식사를 마친 한참 뒤까지도 산행을 강행할 것인지 말 것인지 서로 의견이 분분하던 차에 산행할 결심을 굳히고 버스에 올라타니 모두 29명뿐, 구름이 짙게 내려앉은 성판악의 풍경마저 심란하기 그지없다.

 

마음만 먹으면 쉽게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라서 우의를 챙겨입고 정상을 향해 출발했지만 이런 날 산행이라니 미치지 않고서야 할 짓은 아니다.

산길은 내린 비로 냇물이 되어 흐르고 출발한 지 5분도 채 되질 않아 등산화가 젖어 벌컥거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참으로 희한한 건 폭우가 쉼 없이 쏟아지고 있음에도 계곡엔 생각만큼 물이 많지가 않다는 사실이다.

한라산이 화산석으로 이뤄져 곧바로 빗물이 지하로 스며들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지만, 여느 산 같았으면 계곡에 물이 불어 산행이 쉽지가 않았을 텐데 그나마 다행스러울 일이었다.

 

몇 년 전 1월의 한라산 첫 산행 땐 허리만큼 쌓인 눈과 나뭇가지에 휘돌던 세찬 바람 소리만 가득하고, 정상에 이르러선 거센 광풍을 타고 온 얼음알갱이가 쉼 없이 얼굴을 후려치는 통에 그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쫓기는 듯 내려왔었는데, 오늘은 폭우와 짙은 안개가 산객의 발길을 더디게 한다. 유난히 땀이 많이 흐르는 체질이라 판초 속의 옷은 비를 맞은 것보다 더 후줄근히 젖어서 불편하기 그지없다.

산행을 시작한 지 두 시간 만에 진달래 대피소에 도착할 무렵 빗줄기는 가늘어져 다행이라 여기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정상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산지기가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매단 줄을 쳐 놓고 산객의 발길을 가로막으니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이럴 줄 미리 알았다면 차라리 출발하지 말았어야 했다"라며 대피소 안으로 들어가 판초를 벗고 양말과 셔츠의 물을 짜 다시 입었지만 땀이 식으니 이젠 한기가 엄습해 온다.

여기서 내려갈 바엔 배라도 든든히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음습하기 그지없는 대피소에서 때 이른 점심을 먹고 있을 무렵 뒤에 올라 온 사람들이 정상 쪽으로 올라가고 있다. 빗줄기가 가늘어져 쳐 놨던 줄을 산지기가 걷었던 모양이다.

시간은 조금 지체되었지만, 빗줄기도 가늘어지고 산길이 열렸으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빗줄기가 가늘어지고 마음이 느긋하니 산길엔 늦게 피어나 아직 지지 않은 쑥부쟁이도 보이고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가시엉겅퀴꽃 한 송이가 산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평소 같았으면 카메라를 꺼내서 정성껏 담았을 테지만 판초를 벗어 배낭 깊숙이에 있는 카메라를 꺼낼 마음이 좀처럼 생기지 않아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다.

 

지루할 만큼 평탄하던 산길이 갑자기 가팔라지고 나무로 만든 계단에 이르니 정상이 가까웠나 보다.

첫 산행 때 이 부근에선 미친 듯 불어대던 광풍에 날려가지 않으려고 앞선 사람의 허리를 두 손으로 잡고 몸을 구부린 채 줄을 지어 올랐었는데 오늘은 구름만 짙게 드리워져 시야가 어두워 답답할 뿐이다.

 

출발하면서부터 백록담을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고 올라왔다.

다만 한라산 정상을 한 번 더 오른다는 명분만이라도 좋았다.

그러나 막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정상에 이르니 멀리서 온 산객에게 적선이라도 해 줄 법한데 아쉽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오늘 또한 백록담은 제 속살을 내게 보여줄 용기가 아직 없는가 보다.

 

세상사 원해서 되는 일이란 내가 할 수 있는 것 말고는 확신을 할 수 없다.

어떤 이는 정상에 머물러 있을 때 아주 짧게나마 하늘이 열리는 순간을 경험했다고 하지만 내 삶에 있어서 그런 요행이란 결코 한 번도 없었기에 마음을 접는 일에 망설이지 않는다.

 

걸었던 길을 다시 걷는다는 건 새길보다 재미없고 지루할 일이다. 하지만 폭우로 인해서 하산길이 통제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벌컥거리는 등산화, 젖어서 칙칙한 옷이 불편스럽기 그지없지만 걸어서 왔던 9.6km만큼 또 내려가야만 한다.

젖어서 불편하기 그지없을 귀로에서 나는 혼자 중얼거릴 것이다.

"비를 흠뻑 맞으며 한라산을 올랐노라"라고 그리고 "다시는 비를 맞으며 산행을 하지 않겠노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