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서러운 3월의 마지막 약속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07. 3. 17. 03:33

3월이 시작되기 전에 집으로 돌아 올 계획이던 녀석은
가슴에 고여 폐를 압박했던물을 두번이나 더 빼내며

몇 가지 검사를 더 받기 위해서 한참이나 동생네 집에 머물렀다.

서울로 데려갈 때 고통스러워 하는 녀석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

몇 번 전화를 걸었으나
직접 통화를 하지 못하고 부인과의전화를 통해서

"검사결과가 좋게 나왔고 상태도 좋다"는 소식에
어려운 고비를 잘 넘기게 되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녀석이 서울서 집으로 돌아온 다음날인 10일,
녀석네 집으로전화를 했는데 딸 아이가 받았다.

"아빠 상태가 어떻냐?"
'좋지가 않아요'
"아빠가 전화 받을 수 있냐?"라는 물음에
딸 아이를 통해 나를 확인한 녀석이 전화를 받아 들었다.

"나다. 어떠냐?"라는 물음에
"안 좋다, 많이 안 좋다"라는 단 두마디 말을 하면서도
쇳소리처럼 쇠어버린 목소리에 숨결마저 하도 거칠게 들려서
"이제 겨울도 뒤끝이고 따뜻한 봄이 와서 좋은 바람 쐬면 괜찮아 질테니
아무 걱정말고 편히 쉬고 있어라"며전화를 끊었다.

한 마디라도 말을 덜 하게 해주는 것이

녀석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할 것 같아서
'내일 쯤 가겠다'는 나의 말에 "그래라"는 녀석의 대답으로약속은 했지만

나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평소 신경이예민해져서 누구든 찾아오면 불편해 하곤 했던 녀석이라
곧장 달려가고 싶었음에도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갈 수가 없었다.

마음 속에선 제발 빨리 봄이 와서
따스한 햇살아래 맑은 산바람이라도 마음놓고 들이 마신다면
지난 가을날에 그랬던 것처럼

녀석은 잘 버텨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나의 막연한 바램이자 녀석에 대한 기대였다.

그로부터 나흘 후인 14일 점심무렵,
녀석과 6촌간인 친구로 부터 녀석이 갔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믿기 싫고, 듣기 싫고, 인정하기 싫은 소식은

사실이고 현실이었다.

내가 지금껏 녀석과의 약속을 어긴 경우는단 한번도 없었는데

"내일 쯤 가겠다"는 그 약속이 녀석과 이 생에서 했던 마지막 약속이었고

나는 그 마지막 약속을지키지 못했다.

"그래도 한번 들여다 봅시다"라는 아내의 권유를 애써 외면했던 것이

후회와 한으로 가슴에 박혀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녀석과의 긴 인연을 이렇게 허무하게 끝을 맺었다.

내가 병원으로 허겁지겁 달려갔을 땐
녀석은 가족들에 의해 이미 장례식장으로 옮겨간 뒤였다.

마음같아선 녀석의 주검이라도 보고싶었으나
사흘동안장례식장에 머무는 동안에도 끝내 볼 수 없었다.

다만, 내 고향마을의 언덕베기에

일찌감치 홀로되신 녀석의 어머니께서 일궈놓은

초라한 양파밭 가장자리 한켠에묻혀질 때
눈물나는 아들의 품에 안겨있던 녀석의 영정사진이
나를빤히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편히 쉬거라. 네가 떠나간 곳으로 내가 가는 날

이 생에서네게 했던 마지막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이유를 말할께..."라며

녀석의 영정사진 눈빛과 마주치는순간

시야가 흐릿해지며 눈물이 핑 돌았지만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고인 눈물을 안으로 삼켜야 했다.

3월의 따스한 봄볕과 포근한 바람 한 줄기가
아지랑이를 타고 시리도록 파란하늘로 사라져 가는 풍경은

아들을 가슴에 묻은 녀석 어머니의 통곡소리만 새로울뿐

코흘리게 시절 내 고향 언덕베기 봄날의 풍경그대로였다.

양지녘엔 어느새 진달래가 핏빛 꽃망울을 내밀어놓았다.
녀석의 무덤을 덮은 마른잔디에도
눈물이라도 왈칵 쏟고 싶은 내 서러운 마음에도
하루쯤 촉촉히 봄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녀석을 묻고 온지 이제 단 하루,
이 서러운 3월은 언제 다 지나갈런지......

2007년 3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