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가을걷이를 끝으로농부로써의마지막 남은미련을 버리고

낯선영역에 겁없이 뛰어 들면서만났던 세 사람은

각각 제 자리를 찾기 까지의과정을 함께겪었던 터라

격이 없는 사이가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세 사람이 만나 밤늦도록 술을마시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갈 때도

서로를 배려할 줄 알고 지친 어깨를기대도 마음편한 사이라는 걸 알고 있던아내로 부터

20년이 넘도록 타박같은 건한번도 들어보질 않았습니다.

그러던중한사람이 뜻밖의일로 꼬여서허우적거리기 시작할 무렵

또 한 사람은아내가 시작한 일까지거드느라바빠지게 되고,

나 또한수 년동안 병원을 내 집 드나들 듯하면서 부터

세 사람은 만나는 횟수 보다는전화를 통해서 안부를묻는 일이더 많아졌습니다.

병원을 나들락거리는 동안 '세월보다 더 나은 명약은 없다'는 걸몸소 체험했던 만큼

그에게 꼬여서 심난스럽던일도세월이 흐르다 보면 잘 풀려질 거라 믿고 있었습니다.

며칠 전 "년말인데올 핸 그냥 넘기지 말고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해서

오랫만에세 사람이 술을 두고 마주앉았습니다.

몇 년만에 마시는 술인데도 오가는 이야기들이 심난해선지

뱃속만 뜨거워질 뿐 머릿속은자꾸만 캄캄해질 따름입니다.

보증을 서 달라는 지인의 청을 거절하지 못했던 그는

지인이 파산을 하는 바람에 일단 카드로 대출을 받아대신 빚을갚고

지인으로 부터 돈을 되돌려 받기만을기다리고 있었다는건이미 알고 있던 일입니다.

그러나 돈을 돌려받기는 커녕대출이자가 날이 갈 수록 눈덩이처럼 불어 나자

재산을 모두 청산하여 빚을 갚더라도식구들이 몸을 부칠 샛방은 있어야만 할 것 같아

부부가 합의하여 서류상 이혼을 했다는처음 듣는 이야기도

세상을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며 묵묵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흔히들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들을 하지만

돈만큼 사람의 일을 좌지우지 하는 것도 없습니다.

사랑은 순수해야 한다거나조건이 없어야 한다고들 하나

사랑에도 돈이 개입되다 보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 수밖에 없는 모양입니다.

남들이 부러워 할 만큼 화목했던 가정이

돈에 쪼들리기 시작하면서 부터마찰이 잦아지더라는 이야기에도

돈의 속성을 알고있던 터라 충분히 공감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마찰이 갈등으로, 그리고 감정까지 얽히게되면서한 지붕 안에서 방을 따로 쓰게 되고,

결국엔남남으로 돌아서서서로 떨어진 집에 살기 시작했다는이야기만큼은

소설속에서나 나올 이야기라서도무지 믿겨지질 않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라 그 동안 쌓였던회포를 다 풀 줄 알았는데

어둡고 무거운 짐이 새로 얹혀지는 순간입니다.

늦은 시간, 살을 파고드는 찬 바람이 불어대는골목길을 벗어나와

막차일지도 모를 듯 싶은 버스에 올라타자 마자

차 안의 온기로화끈 달아오릅니다.

추운 날씨에 늦은 시간이라선지승객은 두어명 뿐이지만

행여 술냄새가 풍길까봐 뒷자리로 가서 앉으니

몽롱한 정신에 차창은마치 영화관의화면인냥그늘진 얼굴들이나타났다 사라지곤 합니다.

세 부부가 함께 할 때면

나서지 않으면서도늘 웃음을 잃지 않았던그의부인과

하루 일과를 마치고 아내가기다리는안식처가아닌

아무도 기다려 주지 않는 혼자만의 집으로 향하는그의 뒷모습을 더 이상 바라볼 수가 없어서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맙니다.

믿었던 지인한테 배반을 당하고

결국엔 가정까지 이 지경에 이른 그에게

어떤 힘도 되어주질 못한미안함과부끄러움 때문입니다.

이제 막 겨울이 시작되었는데

까마득히 멀리있는 봄을 기다려야 할 일이 심난스럽기 그지없습니다.

2010, 12, 14.

숨을 쉰다는 건살아있는 생명체에 있어서

가장 으뜸이 되는 생존 조건이 아닐까 싶습니다.

의학적인 관점에선혹여 심장을 앞세우는 게 순서일런지는모르겠으나

숨을 쉬는게노동을 하는 것만큼이나힘에 겨웠던날들을 살아본 사람이라면

내뜻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가만 있어도 숨이 가파서

남들뛰어놀 때바라만 봐야 했던내 어린 시절은

초췌하고 나약해서 물렁하기 그지없는참 가엾고 불행했던날들이었습니다.

성년이 되어가는 동안다행스럽게도 조금씩 나아지긴했으나

정신적으로 자신감이 생겨나고 육체적으로 조금이나마야물어질 수 있었던건

산이 가까이에 있는 동네에 살면서부터가아니었나 싶습니다.

무료하거나 시간이 여유로울 때마다찾던 동네 뒷산은

보통 사람들이라면 단숨에 올라갈 만큼 높지 않았음에도

숨이 가파서대 여섯 번은쉬어야만올라갈 수가 있었습니다.

다섯 번에,네 번, 세 번, 두 번에,그리고 단숨에올라설 수 있기 까지는

쏟은 땀과 흘러보낸세월이결코 적지않았으며

그순간만큼은 내 삶에있어 실로 대단한 사건이라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평생 아래서쳐다보고만 말 것 같았던높고 큰 산도

그 사건이 있은 뒤부턴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를 벗삼아 유유자적 걷고 즐길 수 있게 되었으니,

내게 있어은인을 셋만 꼽으라 한다면

병약한 어린자식의 생명의 끈을 끝까지 놓지 않으셨던 내어머님이 첫번째이시고,

찬바람 부는 들길에서 엄마의 등에 업힌다 죽어가는아이를 보고선

'죽게 내버려 둔다면의원으로써 못할 짓'이라며 집으로 따라와며칠을 묵으며 침을 놓아 살려놓고선

어디 사는 누군지도 알려주지 않고 홀연히 떠나셨다는 내겐 기억조차 없는낯선 할아버지가 두번째이시고,

세번째론빈약했던 심신을 보다 야물게 해 준 산이라고 말하고싶습니다.

인적이 뜸해서 호젓하기만 했던 산길이사람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한 뒤부터

왁작거림과 자지러질 듯한 웃음소리가한낮 잠시동안 숲의 소리들을 대신할 때도 있지만

저마다 쌓이고 얽힌 무겁고 복잡한 일상의 짐들을 털어내려는 몸짓일수도 있어서

충분히 이해 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운동화와목이 긴 양말이면 족했던 십 수년 전에 비해

제대로 갖춘 등산복이라면몇 백만원씩이나드는 게 현실이나

이 또한 물질적으로 풍요로운시대를 사는이들이 누릴 수 있는특권이 아닐까 싶습니다.

더러는남을 의식하지 않고 오디오를 크게켜고 다니거나

사람많은 쉼터에서버젓이 담배연기를 뿜어대는 이들이 거슬리긴 해도

넘칠 땐 비우거나스스로가 자성할줄도 아는 게 사람이라서

간섭보다는 지켜보는 게마음편할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술을좋아하는지인들과 함께 걷는 날이면

나는 어김없이개밥의 도토리입니다.

그런 날은 산에서 시작된 술자리가 하산주로 이어지는 게 정해진 순서이나

눈치껏 빠져나오면 될 일이라서 크게 궤념치 않습니다.

어쩌다초행인 낯선 사람을 만나

사심없이 베풀었던친절이 묘한오해로 바뀌어당혹스러웠던적도 있었습니다.

냉정히 따져볼 때내 행동에 문제가없었던 것도 아니라서 그 미안함이 작지가 않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즐겁게 산행을 마무리 했던만큼

그리 나쁘지 않은 추억거리로 자리메김해 준다면 더없이 고마울 일입니다.

등산 인구가 늘어감에 따라

희귀한동식물의 생존에도 영향을 끼치는경우가 있다고는 하나

적자생존의 법칙에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선스스로 내성을 길러야만 한다면

너무 냉혹한발상이라할런지는 모르겠습니다.

가녀린 생명이지만 기왕 세상에 태어났으니 살아야만 했고

그러기 위해서온갖 시련들을감내하며 살아 왔다고는 하나

그런 차갑고도경직된 관념이내 안에 뿌리박혀 있음을 의식할 때면

내스스로 깜짝깜짝 놀라곤 합니다.

달음박질이라는 말만 들어도헐떡거릴만큼 나약했던사람이

산을 통해서심신을 단련하거나보다 야물어질 수 있었듯이

산에서 만나는모든 이들 또한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산을 즐기면서

일상에서 짊어진 탁한 것들 다 비우고 털어내어 보다 건강한 삶을 누렸으면하는 바램입니다.

2010, 1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