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들어
남정네가 집에서 밥을 한 끼도 안 먹으면 영식님,
한 끼를 먹으면 일식씨,
두 끼를 먹으면 두식이,
세 끼를 다 먹으면 삼식새끼라고 한다지요?
평소 가장의 권위를 고집하며살아 온사람은 아니라지만
차려주는 밥을 앉아서 받아먹는 게 당연한 것 처럼 여기며살아왔던 이의입장에서 볼 때
한갖 우스갯소리로 치부해 버리기엔 왠지 착찹한 느낌이 드는 것이사실입니다.
흔히 들 요즘 세상은
부계사회에서 모계사회로 가는 과도기라지요?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아무 것도 없듯이
이 또한 자연스러운 변화라 여기며 겸허하게받아 들여야만 할 일입니다.
다만누구든 주도권을 쥐게 되면 그만큼 책임과 의무가 뒤따른다는 사실도
미리 생각해 둬야만 할 일입니다.
밥 이야기를시작했는데
모계사회와 부계사회가 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평소 식당밥을 먹고나면 왠지뱃속이더부룩해서
왠만하면밥은 집에서 먹습니다.
세상이 변해 가듯 아내의 심사에도차츰 불평이 쌓여가고 있을런지는 모를 일이나
아직까지는겉으로는 드러내지 않고 있어서
눈치보며끼니를 떼우는이들에 비해 퍽이나운이 좋은 사람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요즘들어 출장을 가는 날이 잦아지면서 부터
점심 한 끼 떼우는 일이 크나큰 과제가 되었습니다.
식당에서 먹는 밥도 썩 내키지도않지만
혼자서식당 자리를 차지하고 밥을 먹는다는 게 그리 편할 일은 아니라서
이런 나를 이해하는 아내는
점심 대용으로 간편식을챙겨주곤 합니다.
며칠 전, 내장산을지척에둔 농공단지로 출장을 갔다가점심때가 되자
끼니를 떼울만한좋은 곳이 어디없을까 하고 산골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자리를 잡은 곳이
하필이면 저만큼에서김을 메는 한 노인네가바라보이는 곳입니다.
괭이로 밭을 메는 노인네는 괭이질 몇 번 하다 말고는 허리를 펴고,
가끔씩은 먼 산도 바라보는 걸로 봐서무척이나 힘에 겨운 모양입니다.
점심때가 늦어가는 시간인데도일을 하고 계시는 것으로 봐서
모르긴 해도 남은 걸 마져 끝내겠다는 심사거나
아니면 아침을 늦게 먹고 나온 이유일 거라는 내 맘대로의 생각을 하며
아내가 챙겨 준 먹거리를 폅니다.
하지만 일하는 이를 앞에 두고 구경하며먹는다는 게 썩 내키질 않아
떡과 과일을 들고노인네에게 다가가니 무서운 걸 본 것 마냥 화들짝 놀라십니다.
하지만 노인네의 경계심도 잠시일 뿐
"날씨가 따뜻해서 빈 밭에 풀도 뽑고 작년에 씌웠던 비닐도 걷으러 나왔는데
일도 안 하다 하려니 무척이나 힘이 든다"며건네드린 떡 하나를맛있게 잡수십니다.
이 밭엔 뭘 심으려시냐고 묻는 내게
"돈부랑 콩이랑 녹두를심어 아들네랑 딸네한테 보내주고
남은 건 나도 먹고........"
내 자신보다 자식들을 먼저 앞세우시는 이 노인네를 보며
생전에 부모님 마음 다 헤아리지 못했던 불효에
마음 한켠이 아려오기시작합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아버지 어머니는 애틋한 그리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살아 생전에편히 모시지못하고
가신 뒤에야 후회를 하는나와 같은 사람들은 모두 다 불효자식입니다.
내 자식들 또한
나 떠난 뒤에 내가 했던후회를 되풀이 할지라도
내 부모님이 그러하셨듯이 나 또한 묵묵히 바라보는 일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습니다.
세상의 이치가 그러한 것 같기 때문입니다.
점심을 빼앗아 먹어 어쩌냐며 한사코 미안해 하는 노인네에게
쉬엄쉬엄 하시라며 떠나오는마음은 부모님에 대한향수에촉촉히 젖어 있었습니다.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산골의 한 언덕베기에서
그 노인네를 통해서 내 어머니가 사셨던봄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었던 건
참으로 기분좋을 일이었습니다.
2011,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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