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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지리산 8차종주산행기(2011)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11. 6. 26. 06:51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산길에서 힘에 겨운 이들의 베낭을 대신 메어 주거나 다리가 아프다며 엄살(?)을 부리는 한 아낙을 업고 내려온 적도 있었다.

부실하기 그지없었던 내 몸에 남들 만큼이나 튼튼한 다리가 있다는 건 무척이나 다행스러울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여겼었다.


하지만 언제부턴지 산에 갈 때면 베낭의 무게에 신경을 쓰거나 좀 더 쉬운 길을 걸을 수 없는지 궁리해 대는 걸 보면 내게 얹혀진 연륜의 무게도 이제 만만찮다는 걸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산행계획을 세우면서 지난해처럼 화엄사에서 대원사까지 화대종주가 아닌 성삼재에서 천왕봉까지 그리고 백무동으로 내려오겠다는 것도 그런 이유이고, 꼭 한 번만 데려가 달라던 아낙들에게 산엘 간다는 사실조차 숨긴 채 친구 복영이랑 두 사람만 대피소 예약을 해 놓았던 것도 지친 산길에서 아낙들의 물병 하나라도 대신 짊어 줄 자신이 없기때문이다.

새벽 3시, 잠에 취해있는 아내를 깨워 승용차에 태우고 길을 나섰다.

산에 가는 게 대단한 일도 아니건만 여덟 번의 종주 중에 다섯 번씩이나 이 짓을 해대고 있는 남편이 귀찮을 법도 하다.

변명같지만 평소 산길을 걷는 일보다 산의 초입까지 가는 일과 하산을 해서 집에 돌아오는 일이 무척이나 번거롭게 여겨지곤 했었다.

가까운 무등산엘 가더래도 시내버스가 아닌 승용차로 가고 오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성삼재에 도착해 아내를 집으로 되돌려 보내고 노고단을 향해서 출발을 하려니 4시 50분이다.

동쪽으로 부터 서서히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나 구름 낀 날씨라서 노고단에서 일출은 미리 접어 두는 게 마음편할 일이다.

단숨에 노고단재를 오르고 내친김에 임걸령까지 내달으며 앞서 걷는 복영이한테 "지리산 종주는 오르랑 내리랑 능선을 따라 걸으니 걸어 볼만한 산"이라고 했던 건 지리산을 몰라서하는 말은 결코 아니다.

몇 번 걸어 본 산이니 만큼 자신감이 서로에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임걸령 샘터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반야봉으로 향하는 노루목과 삼도봉을 지나 화개재까지 내려갔다.


야생화에 심취해 있을 때였다면 길섶에 피어있는 꽃들을 놓칠세라 눈으로 샅샅이 훑느라 더듬거리며 걸었겠지만 오늘은 숲도 보고 시야가 확 트인 곳에선 산 아래의 풍경도 내려다 보며 걸으니 지리산의 초록이 무척이나 싱그럽다.

6월은 봄꽃이 지고 여름꽃이 필 준비를 하는 시기인지 끝물인 연철쭉 꽃송이가 눈물지듯 툭툭 떨어지는 광경 말고는 스치듯 걷는 길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게 별로 없다.

대피소 예약에 있어 6월을 비수기로 분류해 놓은 것도 그때문일까?

화개재에서 지루하게 토끼봉을 오르고 다시 거친 산길을 헐떡거리며 명선봉에 오르는 동안 비오듯 흘러내리는 땀을 쉼없이 닦아내고 있음에도 함께 걷는 복영이는 도무지 땀이라곤 단 한 방울도 흐르지 않는 걸 보면 두 사람의 생리적인 현상이 참으로 대조적이다.

누구든 힘에 부치면 땀이 흐르게 되어 있음에도 단 한 방울도 땀을 흐르지 않고 산길을 걷는 복영이가 무척이나 대단하다.

천왕봉까지 가는데 있어 토끼봉에서 명선봉 구간과 벽소령에서 세석의 구간이 늘 지치게 만들더니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태양이 이글거리던 몇 해전 8월, 복영이랑 함께 이 구간을 지나면서 소문만을 듣고 더듬거려 어렵사리 찾아냈던 총각샘의 시원한 물로 타는 목을 촉촉하게 축였던 기억이 새롭다.

당시에 하도 혼쭐이 났던지라 그 다음부턴 연하천까지 가는데 필요한 물을 임걸령에서 충분하게 채워서 걷곤 했었다.


명선봉에서 내려와 연하천에 닿으니 10시가 넘었다.

등산객으로 초만원을 이루던 어느해 여름, 대피소 예약을 못한 채 산엘 왔다가 명선봉 언저리에서 복영이가 가로 누운 주목에 머리를 부딛혀 이마에 상처를 입은 덕(?)에 환자로 분류되어 잠 자릴 얻어 쉬어갔던 곳이라서 두 사람에게 있어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아직 점심은 이르나 힘든 구간을 지나온 탓인지 지치고 뱃속이 허전해서 간식으로 허기를 면하고 물병에 물을 채워 다시 길을 재촉했다.

벽소령에서 점심을 먹고 힘을 재충전해 제일 힘들게 여겨지곤 하는 세석까지 가겠다는 심사다.


연하천에서 2km 남짓에 있는 형제봉을 지나고 다시 1.6km를 더 걸어 벽소령에 도착할 때까지의 구간은 비교적 평탄하고 시야가 확 트이는 곳이 있어 초록의 산하를 내려다 보며 걷는 느낌도 괜찮다.

벽소령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마치고 식수를 뜨려니 대피소 아래에 있던 샘터는 보이질 않고 100여m나 아래까지 내려가야 한다는 게 조금 심난스럽다.

산길에서 마실 물이 없다는 건 생각지도 못할 일이지만 편히 쉬며 힘을 재충전해야 할 때에 100m나 아래로 내려가고 다시 올라와야 하는 건 썩 내키는 일이 아니다.


이곳에서 부터 오늘의 목적지인 세석까지는 도상거리(=지도상 거리)  6.3km에 불과하지만 걸으면서의 느낌만으론 10km도 훨씬 더 되는 것만 같다.

이 구간은 그 만큼 굴곡도 많고 산길이 거칠 뿐만 아니라 덕평봉과 칠선봉과 영신봉을 오르내리다 보면 체력은 어김없이 바닥이 나고 말아서 이 구간을 걸을 때면 끈기와 오기까지 다 동원해야 한다.

벽소령에서 2.8km거리에 있는 선비샘에 이르니 샘 주변 그늘에서 두 사람의 산객이 버너에 불을 피워놓고 취사를 하고 있다.

지친 산길에서 먹지 않으면 안 될 일이긴 해도 하지 말라는 짓을 하고 있는 이들이 보기좋을 리가 없다.


오죽 배가 고프면 그러랴 싶어 그냥 지나치려는데 마침 지나가던 한 등산객이한 마디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왠 걸, 도둑이 매를 든다고 했던가?

"40년을 지리산에서 살아서 괜찮다"고 되지도 않는 말로 오히려 큰소릴 치는 이에게 한 마디 참견하려다 말고서 자리를 뜨고 말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이와 말을 섞다 보면 짜증이 나거나 내 기분만 잡치고 마는 경우를 수도 없이 겪어봤기 때문이다.


선비샘에서 1.6km를 더 걸어 칠선봉에 오르니 오후 세시 20분이다.

칠선봉에 올라 설 때면 늘 그랬듯이 멀리 한 눈에 들어오는 연화봉 능선과 재석봉과 천왕봉이 오늘도 무척이나 반갑다.

바로 눈앞에 버티고 있는 영신봉에 오를 일이 심난스러울 일이긴 하나 유람을 하듯 쉬엄쉬엄 걷는다 해도 두 시간이면 족할 오늘의 목적지가 바로 그 너머에 있고 해가 질려면 아직도 4시간이나 더 남았다는 생각에 마음은 오히려 느긋하다.

칠선봉에서 내려와 영신봉을 오르는 가파른 계단에 서니 세석까지 1.3km가 남았다는 팻말이 지친 다리에 힘을 불어넣어주는 것만 같다.

계단을 오르며숨이 차오를 때마다 난간에 기대어 숨돌리기를 몇 번, 가까스로 영신봉에 올라서니 초록의 산하와 내가 하나가 된 듯한 느낌이다.

세석을 지척에 뒀다는 생각때문인지 갑자기 긴장이 풀리고 다리에 힘이 다 빠져나간 듯 후들거린다.

성삼재에서 세석까지 12시간동안 도상거리 23km를 걸었으니 이 나이에 그럴만도 하다. 세석대피소로 향하는 길섶엔 지리터리풀이 이제 막 꽃대를 올리기 시작하고 갓 피어난 승마가 석양빛을 받아 무척이나 곱다.

대피소엔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산행객들이 옹기종기 모여 저녁준비가 한창이다.

저녁은 따뜻한 국물이 좋을 것 같아 아내가 챙겨 준 찰밥을 두고서 매점으로 올라 가라면 두 봉지를 사다 끓이니 밋밋했던 속이 확 풀리는 느낌이다.

샘터로 내려가 수건에 물뭍혀 몸을 닦고나니 몸은 개운하나 산기운에 한기가 느껴진다. 지쳐서 피곤한 탓이다.

이럴 땐 그냥 다른 생각 필요없이 잠 자리에 드는 게 상책이라서 두 사람이 모포 네 장으로 깔고 덮고 베게를 만들어 누우니 하룻동안 쌓였던 피곤이 사르르 녹아 없어지는 것 같다.

다음날 아침 4시 반에 대피소를 나와 어둠이 걷혀가는 세석평전을 지나 촛대봉에 오르니 우뚝솟은 천왕봉 넘어로 부터 맑은 서광으로 하루가 열리고 있다.

지리산에 올 때면 으레 천왕봉에서의 일출만을 생각하며 무리하게 야간산행도 서슴치 않았으나, 몇 해 전 천왕봉에서 일출을 복영이랑 함께 접견한 적도 있었고 이번만큼은 무리한 산행은 하지 않겠노라 마음먹었던지라 일출접견 행사같은 건 처음부터 염두에 두질 않았다.

하지만 촛대봉에 올라서는 순간 연화봉과 재석봉과 우뚝솟은 천왕봉이 어우러진 멋진 산그리매를 무대삼아 누군가가 쉼없이 마술을 펼쳐대는 듯 변화무쌍하고 황홀하기 그지없는 여명이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만다.

날마다 하루 한 번 꼭꼭 뜨고 지는 해이지만 어디서 어떻게 맞이하고 보내냐에 따라 의미도 느낌도 다 다른 것 같다.

황홀한 여명과 장엄한 일출경에 푹 빠진 채 반 시간쯤을 촛대봉에서 그렇게 머물었다.


천왕봉까지 남은 거리는 이제 4km 남짓, 일곱 번째 종주 중에 대부분을 야간산행으로 지나다녔던 연하봉 구간이라서 내겐 지리산의 다른 구간에 비해 미지의 세계로 남아있는 구간이다.

한참을 걸어 키큰 나무의 숲길을 빠져나오는 순간 풀잎마다 맺힌 이슬방울들이 맑은 햇살에 영롱한 빛을 반짝이니 갑자기 환상속의 세계로 들어 선 느낌이다.

더구나 촉촉하게 젖은 초록과 맑고 시원한 산바람이 어우러지니 "연하선경"이라는 단어 하나로 이름하기엔 너무나 부족한 것만 같다.

이곳은 틀림없이 신선과 선녀가 사는 곳이다.

만약 아리따운 선녀가 길을 막아 서며 내 옷소매를 붙잡는다면 성삼재까지 바래다 주고 집으로 돌아 간 아내한테는 뭐라고 말을 할까 고민스럽기도 하다.

세석을 출발할 때 장터목에서 아침을 먹자고 했으나 내친 김에 재석봉을 오르고 천왕봉으로 향했다.


천왕봉을 지척에 두고 복영이가 배가 고프다기에 어제 먹다 남은 걸꺼내 허기를 면하니 한결 힘이 나는 것 같다. 그

래서 사람들은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거늘......

하늘로 통하는 통천문을 지나 몇 개의 철계단과 가파른 길을 오르느라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발걸음이 멈춰지질 않는 건 하나도 이상할 일이 아니다.

조금만 더 가면, 조금만 더 오르면 그곳이 바로 천왕봉이기 때문이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천왕봉에 올라서니 처음 왔을 때나 지금 이 순간이나 느낌만큼은 유별나다.

어렵게 먼 길을 걸어 이곳까지 왔다는 사실에 스스로 대견스럽고 작은 일 하나를 해냈다는 사실에 기분도 좋다. 이런 느낌 이런 마음을 꼭 전해주고 싶어 전화기 버튼을 누른다.

내 아내와 내 딸과 내 아들........

그러고 보면 연화봉에서 선녀를 안 만났던 건 참 다행스러운일이다.

아무리 좋은 곳이라 할지라도 이틀밤 째가 되면 집에 가려고 안절부절하는 내 자신은 물론, 사랑하는 내 식솔들에게 있어서도........^^

2011, 6,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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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아픈 기억 속으로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11. 5. 12. 09:30

 

 

앞장서서 바위의 맞은편 쪽으로 가로질러 건널 때

얼음은 딛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 했었다.

어느 한 순간,

낭떠러지 아래로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는 느낌도 잠시 뿐

까마득히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파리가 들끓던 시절엔

직사각형으로 길게자른 종이를 중천장에 나풀거리게 붙여놓곤했었다.

녀석들이 방안 아무데나 일을 치뤄 지저분해지는 걸 막아보겠다는 심사다.

몽롱한 의식속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오고

중천장에 붙어 나불거리던 종이꼬리들이 시야에 가득 채워졌다.

 

나는 누구인지,

그리고 내가 왜 여기에 누워있는 것인지.

내 주변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 보고 있는 이들은 또 누구인지.......

 

....

..........

시간이 좀 더 지난 뒤엔

눈물 범벅이 되신 어머님의 놀란 얼굴도 보이고

걱정스러운 표정의 산집의 당숙 당숙모님, 그리고 두 친구들도 보였다.

 

6촌이면서 생일이 나 보다 넉달이 빨라

그로부터 몇 년 후부터는 형이라 불렀어야 했던 친구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내 기억을 더듬을 수 있도록 차근차근 설명을 해 준다.

 

 


 

셋이서 산 중턱에 있는 검바위에 올라갔으며

내가 그곳 바위를 가로질러 건너편으로 가려다 얼음에 미끄러져 절벽아래로 떨어졌다는 사실과

함께 간 두 친구가 산집까지 업고 내려 와 눕혀 놓았다는 설명을 듣고서야

희미하게나마 내가 친구들과 셋이서 감방산에 올라갔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피로 흥건하게 적신 베게와 머리맡에 올려진 물수건을 걷어내고

나를 바라보는 걱정스러운 눈빛들을 의식하며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여기저기를 살폈다.

 

떨어지는 그 순간에 바위의 작은 모서리라도 붙잡으려 했는지 손톱이 찢겨지고

무릅과 장단지 등에 무언가에 스친 상처와

누군가가 된장을 붙여놓은 머리가 조금씩 쓰리고 아플뿐

몸을 움직이는데는 전혀 불편하지가 않았다.

 

그리고 30여분 쯤후 자리에서 일어나

산집으로 부터 3~4백여m 떨어져 있는 집까지

누구의 부축도 받지 않고 내 발로걸어서 돌아왔다.

 

검바위에서 떨어지고서도

머리가 조금 깨진 것 말고는 사지가 멀쩡한 채 제 발로 걸어서 집에 돌아 온 사건을 두고

한 동안 동네 사람들은 물론 이웃마을까지 적잖은 화잿거리가 되었으니

지금으로 부터 37년 전의 일이다.

 

 


- 1975년 이른 봄날 감방산과 내 고향-

 

 

고향마을 동쪽으로 능선을 길게 늘어뜨린 채

아침이면 어김없이 해가 떠오르는 해발 200m도 채 되지 않은 얕으막한 감방산은

봄이면 유채꽃으로 화려하게 수놓아진 들녘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어 소풍하기에 좋고

여름이면 학교에서 돌아 온 아이들이 소를 풀어놓고 해가 바다로 질 때까지 맘껏 뛰어놀았다.

 

가을무렵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엔 떨어진 솔잎을 긁으러 머슴들이 지게를 지고 달음박질 치거나

눈쌓인 겨울날이면 동네 청년들이 토끼몰이를 하느라 왁자지껄했던,

사계절 내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삶의 애환과 추억거리가 베어있는 감방산의 허리춤엔

가파르게 경사 진 큼지막한 바위가 터줏대감인냥 들어앉아 있다.

 

검바위라 하면 큰 칼을 닮아서 그렇게 부를 거라 생각하기 쉬우나

이 바위의 어디를 봐도 검을 닮은 곳이라곤 없다.

동네 어르신들한테 검바위라 부르게 된 유래를 여쭤봤으나

이해될만한 대답같은 건 들어보질 못했다.

 

추측컨데 오랜 세월동안 바위를 적시며 조금씩 흘러내리는 물로 인해 바위의 표면이 검게 착색되어

멀리서 보면 마치 검은색 바위처럼 보여서 검은바위 또는 검바위라 불렀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 검바위에서 내려다 본 내 고향 -

 

평소 감방산엔 갈퀴나무를 하러 오는 머슴들과 소 풀을 뜯기러 오는 아이들이

자주 나들락거리긴 해도

검바위까지 오르는 건 추석무렵 동네아이들이 화약총을 가지고 올라와

굉음을 터뜨리며 놀때 말고는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날 친구들과 검바위에 올랐던 것도 어떤 목적이 있었던 게 아니라

할 일도 없어 심심하니 예전에 놀던 곳에나 가보자는 심사였다.

산으로 향하면서 혹시나 산토끼라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각자 작대기까지 챙겨서 올라갔다가

산토끼는 커녕바위에서 추락해 실신을 한 나를 업고 산을 내려와야만했던 친구는

얼마나 놀랐을까?

 

 

6촌 형제지간인 그와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고민많던 청년시절까지

서숙대로 얽은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살면서

단 한번도 다툼같은 건 해보지 않았던 이웃이자 친구이자 사이좋은 형제였다.

 

무료할 때마다 서로에게 더없이 좋은 벗이었던 그가

중동 어느 나라로 돈을 벌러 떠난 사이에

나 또한 재미도 희망도 없는 농촌생활의 뜻을접고 고향을 떠나왔다.

 

그로부터 2년 쯤 지난 어느날

중동으로 떠났던 그가 불쑥 직장으로 찾아왔다.

오랜만에 만난 사이라서 직장일 제쳐두고 술이라도 함께 마시련만

직장에서 눈치를 살펴야만 했던 새내기라서 그럴수도 없는 처지였다.

 

결국 책상에 마주 앉아 커피 한 잔으로 대신 할 때

"네가 고향에 남아 있었다면 벌어 온 돈으로 땅을 사서 함께 농사를 지으려 했다"며

무척이나 허전해 하던 표정이 30년이 지난 지끔까지도 눈에 선하다.

 

만약 그 일이 그와 단 둘이서 마주앉는 마지막의 일일 줄 미리 알았다면

그리 서운하게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날 이후 객지에서 각자의 가정을 꾸리고 살면서

집안에 일이 있을 때 잠깐씩이나마 만날 수는 있었으나

예전처럼 서로의 앞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술 한 잔 편하게 마실 여유조차 생기지 않았다.

 

그 친구 딸아이의 돌 무렵이었던 것 같다.

직장에서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막 쉬려던 참이다.

주인아주머니로 부터 전화 받으라는 부름에 아랫층으로 허겁지겁 뛰어내려 갔다.

 

그 때만 해도 세를 들어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전화같은 건생각지도 않을 때였다.

어머니한테서 온 전화였다.

"동구가 직장에서 일을하다 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옮기지도 못하고 죽었단다"

 

"...................."

머릿속이 순식간에 새까만 먹물로 가득 채워지는가 싶더니

고향에서 나와 함께 하고자 했던 꿈을 나 때문에 버려야만 했다는 생각에

내가 죽는날까지 미안해 하며 살아야 한다는.........

착찹하고 허탈함이란 말로 다 표현할 수는 없었다.

 

 


- 1975년 내 친구이자 6촌 형(사진의 왼쪽)과 -

 

그는

감기 한 번 앓지 않았던 참으로 건강했던 사람이었다.

운동회 때는 반 대표로 축구선수로 뽑힐만큼 운동도 잘 했던 사람이었다.

가까이에서 내 가픈 숨소리를 들을 때마다 내 건강을 걱정해주던 그런 사람이었다.

검바위에서 추락했을 때 산아래 산집까지 나를 등에 없고 내려 온 그는

나에게 형이라는 소리조차 제대로 들어보지 못하고

스물 아홉이 되던 해에 홀연히 떠나갔다.

 

참 이상할 일이다.

어렸을 때부터 서로 얼굴 한 번 붉혀 본 적이 없는 이가 그렇게 훌쩍 떠났고,

나와 아내를 맺어 준 녀석이 어느날 갑자기 교통사고로 가더니,

항상 가까이에 붙어살던 녀석도 병을 시름시름 앓다가 떠났다.

 

내 삶에 있어 더없이 좋은 인연이라 여겼던 이들이

왜 한결같이 그렇게 훌쩍 떠나버렸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다.

가끔은 내 삶이

외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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